천국에도 성희롱·성추행이 존재할까?
천국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보통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을 상상한다. 그런데 조금 짓궂게 물어보자. 천국에도 남자와 여자가 있다면, 그곳에도 성희롱이나 성추행 같은 것이 존재할까?
1. 음욕이 살아 있는 천국은 사실 지옥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욕은 본질적으로 결핍에서 나온다.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원하고, 얻으면 잠깐 만족하고, 다시 결핍이 찾아온다. 이 굶주림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것도 죽음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반복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고문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부활 후에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내가 없이 음욕만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데 끝없이 원하는 상태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 그것은 천국의 정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2.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는가
이건 현대인이 처음 던진 질문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신학자들이 씨름해온 주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 이전 인간과 이후 인간을 구분했다. 그는 타락 전 인간에게도 성적 기능은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통제 불가능한 정욕에 지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비슷한 방향으로 갔다. 그는 부활한 몸은 완전해진 몸이며, 지금처럼 육체의 욕구에 끌려다니는 상태가 아니라고 이해했다. 결혼과 출산은 죽음이 있는 세계에서 필요한 구조인데, 죽음이 사라진 곳에서는 그 구조 자체가 불필요해진다는 것이다.
반면 일부 현대 신학자들은 조심하자고 말한다. 성경이 부활 이후의 성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3. 성경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본다
첫째,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 하셨다. 부활 이후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천사와 같고 지금과 다르다는 뜻이다.
둘째, 에덴을 보자.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게 중요하다. 부끄러움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아니라 타락 이후에 생긴 것이다. 즉 부끄러움은 죄가 만들어낸 부작용이다. 숨길 음욕이 없으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성추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셋째, 논리적으로 성별과 정욕은 분리된다. 남녀가 있다고 반드시 정욕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 어린아이들은 성욕 없이도 잘 논다. 다만 천국은 아이 상태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점은 구분해야 한다.
이 네 가지를 종합하면, 천국에는 정욕을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정욕을 만들어내는 결핍 자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배 안 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이 없어도 고통이 없는 것과 같다.
4. 결론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천국에도 성희롱·성추행이 존재할까?
답은 명확하다. 존재할 수 없다. 이유는 그런 것을 하고 싶은 마음, 즉 타인을 욕망의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결핍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부활 이후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이 없으면 대를 이을 필요도 없다.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다면, 그 기능 자체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정리하면 성별은 남지만 정욕은 사라진다. 사랑은 남지만 소유욕은 사라진다. 친밀감은 남지만 성적 결핍은 사라진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남지만 죄로 이어지는 욕망은 사라진다.
성희롱이 금지된 곳이 아니라, 성희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잃는 곳이다.
1. 음욕이 살아 있는 천국은 사실 지옥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욕은 본질적으로 결핍에서 나온다.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원하고, 얻으면 잠깐 만족하고, 다시 결핍이 찾아온다. 이 굶주림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것도 죽음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반복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고문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부활 후에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내가 없이 음욕만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데 끝없이 원하는 상태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 그것은 천국의 정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2.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는가
이건 현대인이 처음 던진 질문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신학자들이 씨름해온 주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 이전 인간과 이후 인간을 구분했다. 그는 타락 전 인간에게도 성적 기능은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통제 불가능한 정욕에 지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비슷한 방향으로 갔다. 그는 부활한 몸은 완전해진 몸이며, 지금처럼 육체의 욕구에 끌려다니는 상태가 아니라고 이해했다. 결혼과 출산은 죽음이 있는 세계에서 필요한 구조인데, 죽음이 사라진 곳에서는 그 구조 자체가 불필요해진다는 것이다.
반면 일부 현대 신학자들은 조심하자고 말한다. 성경이 부활 이후의 성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3. 성경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본다
첫째,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 하셨다. 부활 이후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천사와 같고 지금과 다르다는 뜻이다.
둘째, 에덴을 보자.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게 중요하다. 부끄러움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아니라 타락 이후에 생긴 것이다. 즉 부끄러움은 죄가 만들어낸 부작용이다. 숨길 음욕이 없으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성추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셋째, 논리적으로 성별과 정욕은 분리된다. 남녀가 있다고 반드시 정욕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 어린아이들은 성욕 없이도 잘 논다. 다만 천국은 아이 상태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점은 구분해야 한다.
이 네 가지를 종합하면, 천국에는 정욕을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정욕을 만들어내는 결핍 자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배 안 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이 없어도 고통이 없는 것과 같다.
4. 결론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천국에도 성희롱·성추행이 존재할까?
답은 명확하다. 존재할 수 없다. 이유는 그런 것을 하고 싶은 마음, 즉 타인을 욕망의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결핍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부활 이후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이 없으면 대를 이을 필요도 없다.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다면, 그 기능 자체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정리하면 성별은 남지만 정욕은 사라진다. 사랑은 남지만 소유욕은 사라진다. 친밀감은 남지만 성적 결핍은 사라진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남지만 죄로 이어지는 욕망은 사라진다.
성희롱이 금지된 곳이 아니라, 성희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잃는 곳이다.
학자들은 천국의 성(性)을 어떻게 보았는가
1. 아우구스티누스 — 정욕은 형벌이고, 부활 때 제거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가장 깊이 파고든 사람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정욕(lust)이 인간의 원래 본성이 아니라 타락에 대한 형벌로 생긴 상태라는 것이다. 그는 정욕을 원죄에 대한 벌로 하나님이 부과한 순전히 형벌적인 조건으로 규정했고, 두 번째 부활 이후 성도들에게서 그것이 제거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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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정욕의 '통제 불가능성'이었다. 그는 다른 신체 부위는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데 유독 성적 기관만은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지적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 후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도 바로 이 '육체의 불복종' 때문이라고 봤다. 즉 부끄러움은 정욕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순간 생긴 것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흥미로운 사고 실험이 나온다. 그는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이 정욕 없이도 오직 의지에 따라 생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팔을 올리고 내리듯, 열정이나 욕정의 열기 없이 순전히 의지의 명령만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그렸다. 이 발상의 핵심은 성적 기능과 정욕이 별개라는 것이다.
부활한 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부활 이후에는 혼란의 원인이 되는 정욕이 더 이상 없으며, 몸에서 악덕은 제거되고 본성은 보존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여성의 신체가 부활 때 사라지지 않는다고 봤다. 여성의 성(性)은 악덕이 아니라 본성이며, 부활한 여성의 신체 부위는 옛 용도가 아니라 새로운 아름다움에 맞춰지고, 그 아름다움은 정욕을 일으키는 대신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찬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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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리는 이 글의 핵심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아름다움은 남되 정욕은 사라지고, 성별은 남되 욕망은 찬양으로 전환된다.
2. 토마스 아퀴나스 — 기관은 남지만 옛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아퀴나스의 입장은 흔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정교하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지점이 있다.
먼저 아퀴나스는 부활한 몸이 완전한 몸이라고 봤다. 그는 인간이 본성상 가장 완전한 단계인 청년의 나이로 부활하며, 부활한 몸은 성별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가르쳤다.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 성별의 차이 자체가 종(種)의 완전함에 기여한다고 봤다.
The Thoughtful Catholic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부분이 나온다. 아퀴나스는 성별 기관 자체도 부활 때 그대로 복원된다고 주장했다. 부활은 본성의 결함을 회복시키는 것이므로 본성의 완전함에 속하는 것은 무엇도 부활한 몸에서 제거되지 않으며, 남녀의 생식에 관여하는 기관도 인체의 온전함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으니 기관도 사라진다"는 단순한 논리에 아퀴나스는 동의하지 않는다.
Women Priests
그가 이 반론을 직접 다뤘다. 부활 후에는 결혼도 하지 않으니 생식 기관은 쓸모가 없고, 따라서 부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기관이 그 목적(생식)을 위해 쓰이지 않더라도 몸의 온전함을 위해 복원된다고 답했다. 근거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마태복음 22:30)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결혼과 생식은 사라지지만 신체의 완전함은 남는다는 것이다.
The Thoughtful Catholic
정리하면 아퀴나스의 입장은 이렇다. 기능은 정지하되 형태는 남는다. 생식이라는 목적은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불필요해지지만, 그렇다고 몸이 훼손된 상태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기능이 필요 없으니 아예 없어진다"는 직관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정밀한 구분이다.
3. C. S. 루이스 — 초콜릿을 아는 소년의 비유
현대로 오면 C. S. 루이스의 유명한 비유가 있다. 그는 『기적(Miracles)』에서 천국에 성적 생활이 없다는 사실에 우리가 느끼는 상실감을 어린 소년에 빗댔다.
비유는 이렇다. 성행위가 최고의 육체적 쾌락이라는 말을 들은 어린 소년이 "그럼 그걸 하면서 초콜릿도 먹느냐"고 묻는다. "아니"라는 답을 듣자, 소년은 초콜릿이 없다는 것을 성(性)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여긴다. 소년에게 초콜릿을 포기하는 것은 순전한 손실로만 보인다. 그 자리를 채우는 더 큰 무언가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Think Theology
루이스의 결론은 우리가 바로 그 소년과 같은 처지라는 것이다. 연인들이 황홀경 속에서 초콜릿에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더 좋은 것에 마음을 쏟기 때문인데, 소년은 초콜릿은 알아도 그것을 밀어내는 더 나은 것을 모른다. 우리도 성적 삶은 알지만, 천국에서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것은 언뜻언뜻만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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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천국에 성이 없는 것이 결핍이나 금욕이 아니라는 점이다. 루이스는 충만함이 기다리는 곳인데 우리는 금식을 예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별의 구별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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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대 신학자들 — 방향은 같되 단정은 경계한다
N. T. 라이트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은 대체로 전통적 방향을 따르되, 두 가지를 덧붙인다.
하나는 이 질문 자체가 진지하게 다뤄질 가치가 있다는 인정이다. 새 창조가 성 없이도 완전히 기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조롱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람이 품는 진짜 질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천국에 결혼이 없다"는 표현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부 신학자는 성경이 천국에 결혼이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단 하나의 결혼, 즉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결혼이 있다고 가르친다고 본다. 지상의 결혼은 이 궁극적 결혼을 가리키는 그림자였고,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물러난다는 해석이다.
동시에 이들은 성경이 부활 이후의 성 문제를 세세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며, 지나친 단정을 경계한다. 가장 정직한 종합은 이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오랜 전통은 현재의 결혼·출산·성관계 체계가 부활 이후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방향을 가리키지만, 그 너머의 구체적인 모습은 계시되지 않았다.
관련 성경 구절 정리
부활 후 결혼이 없음 — 논의의 출발점
마태복음 22:30 —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가복음 12:25 —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20:34~36 —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 누가복음이 특히 중요하다. 결혼이 없는 이유를 "다시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못 박기 때문이다. 죽음 없음 → 대를 이을 필요 없음 → 결혼·생식 체계 불필요라는 논리가 성경 본문 자체에 들어 있다.
부끄러움이 없던 상태 — 정욕 이전의 인간
창세기 2:25 —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세기 3:7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 부끄러움이 타락의 결과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정욕과 부끄러움이 한 세트로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부활한 몸의 성격 — 지금과 다른 몸
고린도전서 15:42~44 —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고린도전서 15:50 —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부활한 몸이 현재의 몸과 연속되면서도 질적으로 다른 몸임을 보여준다. 천국을 현재 인간의 연장선으로 보면 안 되는 근거다.
정욕과 음욕에 대한 정의 — '아름다움'과 '음욕'의 구분점
마태복음 5:28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문제 삼는 것은 '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음욕을 품고' 보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정욕은 성경 안에서도 구분된다.
궁극적 결혼 — 현대 신학자들이 주목하는 구절
요한계시록 19:7 —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요한계시록 21:2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지상의 결혼이 사라지는 대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이 완성된다는 해석의 근거 구절이다.
1. 아우구스티누스 — 정욕은 형벌이고, 부활 때 제거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가장 깊이 파고든 사람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정욕(lust)이 인간의 원래 본성이 아니라 타락에 대한 형벌로 생긴 상태라는 것이다. 그는 정욕을 원죄에 대한 벌로 하나님이 부과한 순전히 형벌적인 조건으로 규정했고, 두 번째 부활 이후 성도들에게서 그것이 제거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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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정욕의 '통제 불가능성'이었다. 그는 다른 신체 부위는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데 유독 성적 기관만은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지적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 후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도 바로 이 '육체의 불복종' 때문이라고 봤다. 즉 부끄러움은 정욕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순간 생긴 것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흥미로운 사고 실험이 나온다. 그는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이 정욕 없이도 오직 의지에 따라 생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팔을 올리고 내리듯, 열정이나 욕정의 열기 없이 순전히 의지의 명령만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그렸다. 이 발상의 핵심은 성적 기능과 정욕이 별개라는 것이다.
부활한 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부활 이후에는 혼란의 원인이 되는 정욕이 더 이상 없으며, 몸에서 악덕은 제거되고 본성은 보존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여성의 신체가 부활 때 사라지지 않는다고 봤다. 여성의 성(性)은 악덕이 아니라 본성이며, 부활한 여성의 신체 부위는 옛 용도가 아니라 새로운 아름다움에 맞춰지고, 그 아름다움은 정욕을 일으키는 대신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찬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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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리는 이 글의 핵심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아름다움은 남되 정욕은 사라지고, 성별은 남되 욕망은 찬양으로 전환된다.
2. 토마스 아퀴나스 — 기관은 남지만 옛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아퀴나스의 입장은 흔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정교하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지점이 있다.
먼저 아퀴나스는 부활한 몸이 완전한 몸이라고 봤다. 그는 인간이 본성상 가장 완전한 단계인 청년의 나이로 부활하며, 부활한 몸은 성별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가르쳤다.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 성별의 차이 자체가 종(種)의 완전함에 기여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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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부분이 나온다. 아퀴나스는 성별 기관 자체도 부활 때 그대로 복원된다고 주장했다. 부활은 본성의 결함을 회복시키는 것이므로 본성의 완전함에 속하는 것은 무엇도 부활한 몸에서 제거되지 않으며, 남녀의 생식에 관여하는 기관도 인체의 온전함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으니 기관도 사라진다"는 단순한 논리에 아퀴나스는 동의하지 않는다.
Women Priests
그가 이 반론을 직접 다뤘다. 부활 후에는 결혼도 하지 않으니 생식 기관은 쓸모가 없고, 따라서 부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기관이 그 목적(생식)을 위해 쓰이지 않더라도 몸의 온전함을 위해 복원된다고 답했다. 근거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마태복음 22:30)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결혼과 생식은 사라지지만 신체의 완전함은 남는다는 것이다.
The Thoughtful Catholic
정리하면 아퀴나스의 입장은 이렇다. 기능은 정지하되 형태는 남는다. 생식이라는 목적은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불필요해지지만, 그렇다고 몸이 훼손된 상태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기능이 필요 없으니 아예 없어진다"는 직관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정밀한 구분이다.
3. C. S. 루이스 — 초콜릿을 아는 소년의 비유
현대로 오면 C. S. 루이스의 유명한 비유가 있다. 그는 『기적(Miracles)』에서 천국에 성적 생활이 없다는 사실에 우리가 느끼는 상실감을 어린 소년에 빗댔다.
비유는 이렇다. 성행위가 최고의 육체적 쾌락이라는 말을 들은 어린 소년이 "그럼 그걸 하면서 초콜릿도 먹느냐"고 묻는다. "아니"라는 답을 듣자, 소년은 초콜릿이 없다는 것을 성(性)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여긴다. 소년에게 초콜릿을 포기하는 것은 순전한 손실로만 보인다. 그 자리를 채우는 더 큰 무언가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Think Theology
루이스의 결론은 우리가 바로 그 소년과 같은 처지라는 것이다. 연인들이 황홀경 속에서 초콜릿에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더 좋은 것에 마음을 쏟기 때문인데, 소년은 초콜릿은 알아도 그것을 밀어내는 더 나은 것을 모른다. 우리도 성적 삶은 알지만, 천국에서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것은 언뜻언뜻만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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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천국에 성이 없는 것이 결핍이나 금욕이 아니라는 점이다. 루이스는 충만함이 기다리는 곳인데 우리는 금식을 예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별의 구별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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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대 신학자들 — 방향은 같되 단정은 경계한다
N. T. 라이트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은 대체로 전통적 방향을 따르되, 두 가지를 덧붙인다.
하나는 이 질문 자체가 진지하게 다뤄질 가치가 있다는 인정이다. 새 창조가 성 없이도 완전히 기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조롱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람이 품는 진짜 질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천국에 결혼이 없다"는 표현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부 신학자는 성경이 천국에 결혼이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단 하나의 결혼, 즉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결혼이 있다고 가르친다고 본다. 지상의 결혼은 이 궁극적 결혼을 가리키는 그림자였고,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물러난다는 해석이다.
동시에 이들은 성경이 부활 이후의 성 문제를 세세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며, 지나친 단정을 경계한다. 가장 정직한 종합은 이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오랜 전통은 현재의 결혼·출산·성관계 체계가 부활 이후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방향을 가리키지만, 그 너머의 구체적인 모습은 계시되지 않았다.
관련 성경 구절 정리
부활 후 결혼이 없음 — 논의의 출발점
마태복음 22:30 —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가복음 12:25 —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20:34~36 —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 누가복음이 특히 중요하다. 결혼이 없는 이유를 "다시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못 박기 때문이다. 죽음 없음 → 대를 이을 필요 없음 → 결혼·생식 체계 불필요라는 논리가 성경 본문 자체에 들어 있다.
부끄러움이 없던 상태 — 정욕 이전의 인간
창세기 2:25 —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세기 3:7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 부끄러움이 타락의 결과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정욕과 부끄러움이 한 세트로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부활한 몸의 성격 — 지금과 다른 몸
고린도전서 15:42~44 —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고린도전서 15:50 —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부활한 몸이 현재의 몸과 연속되면서도 질적으로 다른 몸임을 보여준다. 천국을 현재 인간의 연장선으로 보면 안 되는 근거다.
정욕과 음욕에 대한 정의 — '아름다움'과 '음욕'의 구분점
마태복음 5:28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문제 삼는 것은 '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음욕을 품고' 보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정욕은 성경 안에서도 구분된다.
궁극적 결혼 — 현대 신학자들이 주목하는 구절
요한계시록 19:7 —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요한계시록 21:2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지상의 결혼이 사라지는 대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이 완성된다는 해석의 근거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