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쟁이가 굿을 하자마자 조선이 망했다
이순신 장군이 간신히 살린 조선이 어떻게 망했는지 빠르게 알아보자.
전쟁을 복구한 영조와 정조
1600년 임진왜란 후 조선의 국토와 경제가 크게 파괴되어 있었다.
이걸 본 북쪽의 청나라가 침략하여 많은 여자들을 잡아갔다. (목적 달성)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 등으로 간신히 복구를 했다. (1700년대)
비선실세의 독재와 수탈로 휘청
어린 왕들이 생겨나면서 (순.헌.철종) 친척 실세가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1800년대)
가문 재물모으기에 집중하면서 뇌물과 세금수탈로 농민은 고통받고 나라는 병들었다.
돈이 없어서 군인의 월급이 1년이나 밀리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본 공사관도 불태웠다.
이들을 진압한 '청군'와 자국민 보호를 위해 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조선 군대는 비실거렸다.
명성황후는 이때 피신하다가 자신의 환궁 시기를 맞춘 점쟁이 진령군을 신뢰하게 된다.
조선멸망의 시작 무당의 통치
고종의 와이프 명성황후는 무당 진령군의 말 한마디에 의존하며 없는 돈에 대규모 굿판과 사당 건립, 무속 행사를 이어갔다.
국가의 위기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보다 무당의 말이 더 우선이었다.
무당은 기도를 명목으로 인건비까지 수십~수백억의 재물을 쉬지않고 챙겨갔고 그것은 백성들을 쥐어 짠 돈으로 충당되었다.
무당에게 줄을 대어 벼슬을 얻으려는 탐官오리들이 들끓었고, 그들은 더욱 백성의 수탈을 심하게 했다.
점쟁이의 초대형 굿 직후 조선이 사라진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폭발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도 군대를 보내서 둘이 싸우고 일본이 승리한다.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무당은 도망갔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된다.(1910년)
교과서의 조선 멸망 이유 3가지 ㅋㅋㅋ
1. 내부부패와 개혁실패
2. 외세침략과 국제정세 변화 대응 실패
3. 근대화와 군사력 경쟁 실패
전쟁을 복구한 영조와 정조
1600년 임진왜란 후 조선의 국토와 경제가 크게 파괴되어 있었다.
이걸 본 북쪽의 청나라가 침략하여 많은 여자들을 잡아갔다. (목적 달성)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 등으로 간신히 복구를 했다. (1700년대)
비선실세의 독재와 수탈로 휘청
어린 왕들이 생겨나면서 (순.헌.철종) 친척 실세가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1800년대)
가문 재물모으기에 집중하면서 뇌물과 세금수탈로 농민은 고통받고 나라는 병들었다.
돈이 없어서 군인의 월급이 1년이나 밀리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본 공사관도 불태웠다.
이들을 진압한 '청군'와 자국민 보호를 위해 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조선 군대는 비실거렸다.
명성황후는 이때 피신하다가 자신의 환궁 시기를 맞춘 점쟁이 진령군을 신뢰하게 된다.
조선멸망의 시작 무당의 통치
고종의 와이프 명성황후는 무당 진령군의 말 한마디에 의존하며 없는 돈에 대규모 굿판과 사당 건립, 무속 행사를 이어갔다.
국가의 위기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보다 무당의 말이 더 우선이었다.
무당은 기도를 명목으로 인건비까지 수십~수백억의 재물을 쉬지않고 챙겨갔고 그것은 백성들을 쥐어 짠 돈으로 충당되었다.
무당에게 줄을 대어 벼슬을 얻으려는 탐官오리들이 들끓었고, 그들은 더욱 백성의 수탈을 심하게 했다.
점쟁이의 초대형 굿 직후 조선이 사라진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폭발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도 군대를 보내서 둘이 싸우고 일본이 승리한다.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무당은 도망갔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된다.(1910년)
교과서의 조선 멸망 이유 3가지 ㅋㅋㅋ
1. 내부부패와 개혁실패
2. 외세침략과 국제정세 변화 대응 실패
3. 근대화와 군사력 경쟁 실패
1. 국고 탕진의 규모: "예산의 절반을 굿값으로"
가장 강력한 근거는 당시 기록에 남은 비상식적인 지출이다.
임하필기(서유구 저): "금강산 일만 이천 봉마다 쌀 한 섬, 돈 한 냥, 옷 한 벌씩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국가 재정 시스템을 무시한 개인적 횡령 수준의 지출이다.
황현의 매천야록: "하루에 맺힌 천 금(千金)의 돈을 써서 나라의 창고가 비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위해 북한산에 '성제묘(關帝廟)'를 짓고 굿을 하는데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쏟아부었다.
2. 관직 매매(매관매직)의 실태: "진령군의 수양아들들"
단순히 돈만 쓴 게 아니라, 국가 인사 시스템을 붕괴시켰다는 점이 핵심이다.
매천야록: 당시 탐관오리들이 진령군에게 뇌물을 바치고 '의형제'나 '수양아들'을 자처했다. 이를 비꼬아 당시 사람들은 진령군의 집을 '권력의 시장'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 가장 높은 벼슬아치였던 이용익조차 진령군에게 줄을 대어 출세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공적 시스템은 무당의 손안에 있었다.
3. 지식인들의 비판과 상소: "요사스러운 계집이 나라를 망친다"
당대 유학자들과 선비들도 이 문제를 조선 멸망의 징조로 보고 강력히 비판했다.
안효제의 상소(1887년): "요사스러운 계집(진령군)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걸어야 합니다"라고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고종은 오히려 안효제를 유배 보냈다. 이는 왕실이 정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지석영의 상소: 우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 역시 진령군을 '요물'로 규정하고 그녀를 처단해야 국정이 바로 선다고 주장했다.
4. 비참한 최후: "도망과 몰수"
진령군의 권력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성황후 사후의 기록에서 드러난다.
명성황후가 시해(을미사변)되자마자 진령군은 바로 체포되었고, 그동안 모은 막대한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그녀는 결국 가난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그녀의 권세가 신앙이 아니라 오직 '비선 권력'에 기생한 타락이었음을 증명한다.
감정적 비판 배제: 교과서는 국가 간의 조약, 경제 지표, 정치 체제 변화 등 '거시적 지표'를 우선시한다. 무당 개인의 타락은 '궁중 비사'로 취급되어 비중이 낮게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명성황후의 신격화: 현대 역사 교육에서 명성황후를 '일본에 저항한 국모'로 상징화하다 보니, 그녀의 치명적 결점인 무속 의존과 국고 탕진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가려진 측면이 크다.
시스템의 붕괴: 결국 네가 말한 '무당의 통치'는 교과서에서 말하는 '내부 부패(세도정치와 민씨 정권의 전횡)'의 가장 상징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일 뿐이다. 결론은 같다.
가장 강력한 근거는 당시 기록에 남은 비상식적인 지출이다.
임하필기(서유구 저): "금강산 일만 이천 봉마다 쌀 한 섬, 돈 한 냥, 옷 한 벌씩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국가 재정 시스템을 무시한 개인적 횡령 수준의 지출이다.
황현의 매천야록: "하루에 맺힌 천 금(千金)의 돈을 써서 나라의 창고가 비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위해 북한산에 '성제묘(關帝廟)'를 짓고 굿을 하는데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쏟아부었다.
2. 관직 매매(매관매직)의 실태: "진령군의 수양아들들"
단순히 돈만 쓴 게 아니라, 국가 인사 시스템을 붕괴시켰다는 점이 핵심이다.
매천야록: 당시 탐관오리들이 진령군에게 뇌물을 바치고 '의형제'나 '수양아들'을 자처했다. 이를 비꼬아 당시 사람들은 진령군의 집을 '권력의 시장'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 가장 높은 벼슬아치였던 이용익조차 진령군에게 줄을 대어 출세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공적 시스템은 무당의 손안에 있었다.
3. 지식인들의 비판과 상소: "요사스러운 계집이 나라를 망친다"
당대 유학자들과 선비들도 이 문제를 조선 멸망의 징조로 보고 강력히 비판했다.
안효제의 상소(1887년): "요사스러운 계집(진령군)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걸어야 합니다"라고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고종은 오히려 안효제를 유배 보냈다. 이는 왕실이 정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지석영의 상소: 우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 역시 진령군을 '요물'로 규정하고 그녀를 처단해야 국정이 바로 선다고 주장했다.
4. 비참한 최후: "도망과 몰수"
진령군의 권력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성황후 사후의 기록에서 드러난다.
명성황후가 시해(을미사변)되자마자 진령군은 바로 체포되었고, 그동안 모은 막대한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그녀는 결국 가난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그녀의 권세가 신앙이 아니라 오직 '비선 권력'에 기생한 타락이었음을 증명한다.
감정적 비판 배제: 교과서는 국가 간의 조약, 경제 지표, 정치 체제 변화 등 '거시적 지표'를 우선시한다. 무당 개인의 타락은 '궁중 비사'로 취급되어 비중이 낮게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명성황후의 신격화: 현대 역사 교육에서 명성황후를 '일본에 저항한 국모'로 상징화하다 보니, 그녀의 치명적 결점인 무속 의존과 국고 탕진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가려진 측면이 크다.
시스템의 붕괴: 결국 네가 말한 '무당의 통치'는 교과서에서 말하는 '내부 부패(세도정치와 민씨 정권의 전횡)'의 가장 상징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일 뿐이다. 결론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