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끝낸다던 '사해문서' 왜 숨겼나?
동굴에서 나온 2천 년 전의 목소리
1947년, 사해 북서쪽 쿰란. 잃어버린 염소를 찾던 베두인 목동이 절벽 동굴에 돌을 던졌다가 항아리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안에서 나온 가죽 두루마리가 바로 사해문서다.
이후 주변 11개 동굴에서 900권이 넘는 책이 수만 조각으로 부서진 채 쏟아졌다. 연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세기. 예수 시대와 정확히 겹치거나 그보다 앞선다.
그래서 조각들을 맞추고 해독할 국제 편집팀이 꾸려졌다. 그런데 편집팀장은 가톨릭 신부였고, 유대교 문서인데도 유대인 학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상하게 오랫동안 공개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의심했다.
내부에서 터진 폭로
해독 편집팀 안에 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영국 학자 존 알레그로. 팀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앙이 없던 그는 동료들이 기독교에 불리한 내용을 감추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가 주목한 건 문서 속 인물 '의의 교사'였다. 쿰란 공동체를 이끈 이 지도자는 '악한 제사장'에게 박해를 받았다. 의로운 스승, 예루살렘 권력자의 박해, 그리고 그를 따르며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공동체의 생활도 초대교회와 닮았다. 물로 몸을 씻는 정결 의식을 행했다. 떡과 새 포도주로 공동 식사를 했다. 들어오는 사람은 재산을 공동체에 내놓았다. 스스로를 '빛의 아들들'이라 부르며 '어둠의 아들들'과의 마지막 전쟁을 기다렸다. 아니 그렇다면 예수라는 인물은 공동체 '의의 교사' 오마주?
바티칸 은폐설, 그리고 스캔들
1991년에는 바티칸이 사해문서를 은폐하고 있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교회가 문서를 통제하고, 예수의 독창성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나오지 않도록 편집팀을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이사야 53장은 기독교인이 나중에 고쳤다, 신약은 그리스 신화와 철학을 베꼈다 같은 오래된 비판들까지 다시 소환되며 아주 난리가 났다.
그리고 1991년, 둑이 터졌다
1991년 가을, 상황은 한순간에 뒤집혔다. 미국의 교수와 대학원생이 편집팀 내부용 단어 색인을 컴퓨터로 역추적해 원문을 복원해 출판했다. 몇 주 뒤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도서관은 보관용으로 맡아두었던 전체 사진 필름을 누구나 볼 수 있게 풀겠다고 발표했다. 그해 말에는 사진 전체가 책으로 찍혀 나왔다.
40년 동안 잠겨 있던 문이 한꺼번에 열렸다. 전 세계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드디어 신약이 고대의 것들을 카피했다는 증거들.... 기독교를 끝낼 중대한 내용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실망한 음모론자들
먼저 예수가 없었다. 예수라는 이름도, 그를 암시하는 인물도 나오지 않는다.
'의의 교사'는 예수가 아니었다. 예수보다 100년 넘게 앞선 인물이고, 신이라 주장한 적도, 부활했다는 기록도 없다. 닮은 건 분위기뿐이었다.
기독교의 종말은커녕 오히려 비판자들에 대한 반박 정보들만 있었다.
반전 하나, 이사야 53장은 예수보다 먼저 있었다. 기원전 2세기 이사야서 두루마리에 고난받는 종의 예언이 지금 성경과 거의 똑같이 들어 있었다. 기독교인이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주장은 끝났다.
반전 둘, 4번 동굴 조각(4Q246)에는 장차 올 이가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불릴 거라는 문장이 있다. 누가복음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과 거의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온 개념이라는 주장이 무너졌다.
반전 셋, 또 다른 조각(4Q521)은 메시아가 오면 눈먼 자가 보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고 적는다. 세례 요한이 "당신이 그분입니까" 물었을 때 예수가 한 대답과 똑같다. 예수는 돌려 말한 게 아니라 "내가 그 메시아다"라고 답한 것이다.
반전 넷, 요한복음의 빛과 어둠 언어는 그리스 철학에서 왔다는 게 한때 정설이었다. 그런데 쿰란 사람들은 스스로를 빛의 아들이라 불렀다. 요한복음의 뿌리는 그리스가 아니라 예수 시대 유대 땅이었다.
그래서, 왜 숨겼는가
답은 허무할 만큼 세속적이다. 학자들의 밥그릇이었다. 처음 출판하는 사람이 명예를 가져가는 학계에서, 소수의 편집팀은 조각을 쥐고 놓지 않았다. 본업은 따로 있었고, 완벽주의에, 게으름까지 겹쳤다. 숨길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놓기 싫어서 숨긴 것이다.
게다가 음모론이 맞았다면 '기독교는 사기'라는 영화도 나오고 언론들도 '기독교의 종말'이라며 온 세상이 뒤집어졌을 텐데.. 막상 열어보니 기독교에 유리한 내용만 나오자, 그 많던 '기독교의 종말' 기사와 방송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 어디 갔냐.
1947년, 사해 북서쪽 쿰란. 잃어버린 염소를 찾던 베두인 목동이 절벽 동굴에 돌을 던졌다가 항아리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안에서 나온 가죽 두루마리가 바로 사해문서다.
이후 주변 11개 동굴에서 900권이 넘는 책이 수만 조각으로 부서진 채 쏟아졌다. 연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세기. 예수 시대와 정확히 겹치거나 그보다 앞선다.
그래서 조각들을 맞추고 해독할 국제 편집팀이 꾸려졌다. 그런데 편집팀장은 가톨릭 신부였고, 유대교 문서인데도 유대인 학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상하게 오랫동안 공개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의심했다.
내부에서 터진 폭로
해독 편집팀 안에 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영국 학자 존 알레그로. 팀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앙이 없던 그는 동료들이 기독교에 불리한 내용을 감추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가 주목한 건 문서 속 인물 '의의 교사'였다. 쿰란 공동체를 이끈 이 지도자는 '악한 제사장'에게 박해를 받았다. 의로운 스승, 예루살렘 권력자의 박해, 그리고 그를 따르며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공동체의 생활도 초대교회와 닮았다. 물로 몸을 씻는 정결 의식을 행했다. 떡과 새 포도주로 공동 식사를 했다. 들어오는 사람은 재산을 공동체에 내놓았다. 스스로를 '빛의 아들들'이라 부르며 '어둠의 아들들'과의 마지막 전쟁을 기다렸다. 아니 그렇다면 예수라는 인물은 공동체 '의의 교사' 오마주?
바티칸 은폐설, 그리고 스캔들
1991년에는 바티칸이 사해문서를 은폐하고 있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교회가 문서를 통제하고, 예수의 독창성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나오지 않도록 편집팀을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이사야 53장은 기독교인이 나중에 고쳤다, 신약은 그리스 신화와 철학을 베꼈다 같은 오래된 비판들까지 다시 소환되며 아주 난리가 났다.
그리고 1991년, 둑이 터졌다
1991년 가을, 상황은 한순간에 뒤집혔다. 미국의 교수와 대학원생이 편집팀 내부용 단어 색인을 컴퓨터로 역추적해 원문을 복원해 출판했다. 몇 주 뒤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도서관은 보관용으로 맡아두었던 전체 사진 필름을 누구나 볼 수 있게 풀겠다고 발표했다. 그해 말에는 사진 전체가 책으로 찍혀 나왔다.
40년 동안 잠겨 있던 문이 한꺼번에 열렸다. 전 세계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드디어 신약이 고대의 것들을 카피했다는 증거들.... 기독교를 끝낼 중대한 내용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실망한 음모론자들
먼저 예수가 없었다. 예수라는 이름도, 그를 암시하는 인물도 나오지 않는다.
'의의 교사'는 예수가 아니었다. 예수보다 100년 넘게 앞선 인물이고, 신이라 주장한 적도, 부활했다는 기록도 없다. 닮은 건 분위기뿐이었다.
기독교의 종말은커녕 오히려 비판자들에 대한 반박 정보들만 있었다.
반전 하나, 이사야 53장은 예수보다 먼저 있었다. 기원전 2세기 이사야서 두루마리에 고난받는 종의 예언이 지금 성경과 거의 똑같이 들어 있었다. 기독교인이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주장은 끝났다.
반전 둘, 4번 동굴 조각(4Q246)에는 장차 올 이가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불릴 거라는 문장이 있다. 누가복음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과 거의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온 개념이라는 주장이 무너졌다.
반전 셋, 또 다른 조각(4Q521)은 메시아가 오면 눈먼 자가 보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고 적는다. 세례 요한이 "당신이 그분입니까" 물었을 때 예수가 한 대답과 똑같다. 예수는 돌려 말한 게 아니라 "내가 그 메시아다"라고 답한 것이다.
반전 넷, 요한복음의 빛과 어둠 언어는 그리스 철학에서 왔다는 게 한때 정설이었다. 그런데 쿰란 사람들은 스스로를 빛의 아들이라 불렀다. 요한복음의 뿌리는 그리스가 아니라 예수 시대 유대 땅이었다.
그래서, 왜 숨겼는가
답은 허무할 만큼 세속적이다. 학자들의 밥그릇이었다. 처음 출판하는 사람이 명예를 가져가는 학계에서, 소수의 편집팀은 조각을 쥐고 놓지 않았다. 본업은 따로 있었고, 완벽주의에, 게으름까지 겹쳤다. 숨길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놓기 싫어서 숨긴 것이다.
게다가 음모론이 맞았다면 '기독교는 사기'라는 영화도 나오고 언론들도 '기독교의 종말'이라며 온 세상이 뒤집어졌을 텐데.. 막상 열어보니 기독교에 유리한 내용만 나오자, 그 많던 '기독교의 종말' 기사와 방송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 어디 갔냐.
기독교를 끝낸다던 '사해문서' 왜 숨겼나?
예수가 태어나기 200년 전에 쓰인 문서가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안에 예수의 가르침이 이미 들어 있다면? 세례도, 떡과 포도주의 식사도, 재산을 나누는 공동체도, 억울하게 박해받은 의로운 스승도 이미 있다면?
그렇다면 예수는 새로운 것을 가르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있던 한 종파를 베낀 사람이 된다. 기독교는 거기서 끝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문서가 발견됐다. 발견된 뒤 40년 동안 세상은 그 내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동굴에서 나온 2천 년 전의 목소리
1947년, 사해 북서쪽 쿰란. 소금기 가득한 절벽과 돌밭뿐인 황량한 땅이다. 베두인 타아미레 부족의 젊은 목동 무함마드 에드디브가 잃어버린 염소를 찾고 있었다. 절벽에 뚫린 작은 구멍을 본 그는 안에 염소가 숨었나 싶어 돌을 던졌다. 그런데 들려온 건 염소 울음이 아니라 뭔가 깨지는 소리였다.
동굴 안에는 뚜껑 덮인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었다. 목동들은 금화를 기대했지만 나온 건 천에 싸인 낡은 가죽 두루마리 몇 개뿐이었다. 실망한 그들은 이걸 베들레헴 시장에 들고 갔다. 신발 수선용 가죽으로나 쓸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두루마리는 베들레헴의 구두 수선공이자 골동품상 칸도의 손을 거쳐 두 갈래로 흩어졌다. 네 개는 예루살렘 시리아 정교회 대주교 마르 사무엘이 24파운드 정도에 샀다. 나머지 세 개는 히브리대학교 고고학 교수 엘르아살 수케닉이 샀다.
수케닉이 두루마리를 확인한 날이 1947년 11월 29일이었다. 바로 그날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통과됐다. 이스라엘 건국의 길이 열린 날, 2천 년 전 유대인의 문서가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이걸 우연이 아니라 섭리라고 믿었다.
신문 광고에 나온 성경
그 사이 전쟁이 터졌다. 대주교는 두루마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팔려고 했지만 아무도 사지 않았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서로 자기 땅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판에, 샀다가 소송에 휘말릴 물건을 누가 사겠는가.
결국 1954년 6월, 월스트리트저널 광고란에 이상한 광고가 실렸다. 기원전 2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경 사본 네 개를 판다는 내용이었다. 중고차 광고 옆에 인류 최고(最古)의 성경 사본이 매물로 나온 것이다.
마침 미국에서 강연 중이던 사람이 이 광고를 봤다. 수케닉 교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군 참모총장 출신 고고학자 이갈 야딘이었다. 이스라엘이 산다고 하면 대주교가 안 팔 게 뻔했다. 야딘은 이름을 숨기고 중간 사람을 내세웠다. 뉴욕 호텔 지하 금고에서 25만 달러에 거래가 끝났다. 대주교는 거래가 끝난 뒤에야 두루마리가 이스라엘로 간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산 세 개와 아들이 산 네 개. 첫 동굴의 일곱 두루마리는 그렇게 다시 한자리에 모였고, 비교적 빨리 세상에 공개됐다. 여기까지는 해피엔딩이었다.
진짜 문제는 4번 동굴이었다
그 뒤 베두인들과 고고학자들이 주변 절벽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11개의 동굴에서 문서가 나왔다. 그중 1952년에 발견된 4번 동굴이 결정적이었다. 온전한 두루마리가 아니라 수만 개의 조각이 흙더미 속에 쌓여 있었다. 모두 합치면 900권이 넘는 책이 찢어지고 섞인 채 나온 것이다. 연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세기. 예수 시대와 정확히 겹치거나 그보다 앞선다.
당시 쿰란은 요르단 땅이었다. 요르단은 조각을 사들일 돈이 없었고, 그래서 외국 기관들이 돈을 대고 나중에 조각 일부를 받기로 했다. 그 돈을 댄 기관 중에는 바티칸 도서관도 있었다. 기억해두자. 나중에 이게 떡밥이 된다.
문지기는 가톨릭 신부였다
조각들을 맞추고 해독할 국제 편집팀이 꾸려졌다. 팀장은 롤랑 드 보. 예루살렘 프랑스 성서고고학연구소를 이끌던 도미니코회 가톨릭 신부였다. 쿰란 유적 발굴도 그가 지휘했다.
팀원은 열 명이 채 안 됐고, 대부분 가톨릭 사제이거나 기독교 학자였다. 반면 유대인 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요르단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교 문서를, 유대인은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팀은 조각을 나눠 가진 채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다. 규칙은 단순했다. 맡은 사람이 출판하기 전에는 아무도 못 본다. 외부 학자가 사진 한 장 보여달라고 해도 거절했다. 팀원이 죽거나 은퇴하면 그 몫은 자기 제자에게 넘어갔다. 드 보가 죽은 뒤에도 팀장 자리는 또 다른 도미니코회 신부에게 넘어갔다.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이제 유대인이 문서를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이스라엘은 기존 팀을 그대로 뒀다. 1980년대 말이 되도록 4번 동굴 자료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기독교 성직자들이 기독교의 기원을 흔들 수 있는 문서를 수십 년째 독점하고 있는 상황.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예수는 쿰란에서 나왔다"
의심은 문서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시작됐다. 1950년, 프랑스 학자 뒤퐁 소메르는 쿰란 문서 속 '의의 교사'가 여러 면에서 예수를 미리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1955년에는 미국 평론가 에드먼드 윌슨이 잡지 뉴요커에 긴 글을 실어, 학자들이 기독교의 독창성이 흔들릴까 봐 이 문제를 피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 글은 책으로도 나와 대중에게 크게 퍼졌다.
사실 이런 생각은 더 오래됐다. 19세기 프랑스 학자 르낭은 사해문서가 발견되기도 전에 기독교를 두고 크게 성공한 에세네파라고 평한 적이 있다. 에세네파는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론, 로마의 플리니우스가 기록한 유대교의 한 종파다. 플리니우스는 그들이 사해 서쪽에 산다고 적었다. 쿰란 공동체가 바로 그 에세네파로 여겨진다. 르낭의 말을 증명할 물증이 동굴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내부에서 터진 폭로
편집팀 안에 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의 존 알레그로. 팀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앙이 없던 그는 동료들이 기독교에 불리한 내용을 감추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가 주목한 건 문서 속 인물 '의의 교사'였다. 쿰란 공동체를 이끈 이 지도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악한 제사장'에게 박해를 받았다. 의로운 스승, 예루살렘 권력자의 박해, 그리고 그를 따르며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공동체의 생활도 초대교회와 닮았다. 물로 몸을 씻는 정결 의식을 매일 행했다. 유적에서는 계단 달린 물웅덩이가 여러 개 나왔다. 제사장이 떡과 새 포도주를 축복하는 공동 식사를 했다. 들어오는 사람은 재산을 공동체에 내놓았다. 스스로를 '빛의 아들들'이라 부르며 '어둠의 아들들'과의 마지막 전쟁을 기다렸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이사야서 구절을 자기들 사명으로 삼았는데, 이건 복음서가 세례 요한을 소개할 때 쓰는 바로 그 구절이다.
세례, 성찬, 공동 소유, 빛과 어둠, 광야의 외침. 아니 그렇다면 예수라는 인물은 쿰란 공동체 '의의 교사'의 오마주?
알레그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3번 동굴에서 나온 '구리 두루마리'를 해독했는데, 이건 성경도 규칙서도 아닌 보물 목록이었다. 금은 수십 톤이 어디어디 묻혀 있다는 60여 곳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알레그로는 직접 탐사대를 꾸려 보물을 찾으러 나섰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70년, 기독교는 원래 환각버섯을 숭배하던 컬트였다는 책을 내면서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됐다. 하지만 대중의 기억 속에는 '진실을 말하려다 쫓겨난 내부 고발자'로 남았다.
바티칸 은폐설, 그리고 스캔들
1980년대가 되자 의심은 분노로 바뀌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로버트 아이젠먼 교수는 '의의 교사'가 사실 예수의 동생 야고보이고, 문서 속 '거짓말쟁이'는 사도 바울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놨다. 예수의 원래 가르침은 쿰란 같은 엄격한 유대 종파였는데 바울이 이걸 이방인 입맛에 맞게 바꿔 기독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걸 확인할 원문은 볼 수가 없었다.
1991년에는 영국 작가 베이전트와 리가 바티칸이 사해문서를 은폐하고 있다는 책을 내 베스트셀러가 됐다. 교회가 편집팀을 통제해 예수의 독창성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나오지 않게 막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가톨릭 신부 팀장, 돈을 댄 바티칸 도서관, 쫓겨난 무신론자 내부자. 퍼즐은 너무 잘 맞았다.
여기에 결정타가 터졌다. 1990년, 당시 편집팀장이던 하버드대 교수 존 스트러그넬이 이스라엘 신문 인터뷰에서 유대교를 끔찍한 종교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는 곧바로 쫓겨났고, 처음으로 이스라엘 학자 엠마누엘 토브가 팀장이 됐다. 유대교를 경멸하는 기독교 학자가 40년 가까이 유대교 문서의 문지기였던 셈이다.
여기에 이사야 53장은 기독교인이 나중에 고쳤다, 신약의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말이다, 요한복음은 그리스 철학이 들어간 후대 작품이다 같은 오래된 비판들까지 다시 소환되며 아주 난리가 났다. 사해문서만 열리면 이 모든 게 증명될 것 같았다.
그리고 1991년, 둑이 터졌다
미국 성서고고학 잡지 편집장 허셸 섕크스는 몇 년째 "사해문서를 해방하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1991년 가을, 상황은 한순간에 뒤집혔다.
9월 초, 신시내티 히브리유니언칼리지의 노교수 워커홀더와 대학원생 아벡이 폭탄을 터뜨렸다. 편집팀이 내부용으로 만든 단어 색인집을 입수해, 컴퓨터로 역추적해서 원문을 복원해 출판해버린 것이다. 거의 시력을 잃은 노교수와 컴퓨터를 다루는 젊은 학생이 40년 독점을 깬 것이다. 편집팀은 해적질이라고 분노했다.
몇 주 뒤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도서관이 두 번째 폭탄을 터뜨렸다. 사고에 대비해 보관용으로 맡아두었던 전체 사진 필름이 자기들에게 있고, 이걸 누구나 볼 수 있게 풀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해 11월에는 섕크스 쪽에서 사진 전체를 책으로 찍어냈다.
40년 동안 잠겨 있던 문이 한꺼번에 열렸다. 전 세계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드디어 신약이 고대의 것들을 카피했다는 증거들... 기독교를 끝낼 중대한 내용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실망한 음모론자들
먼저 예수가 없었다. 예수라는 이름도, 그를 암시하는 인물도 나오지 않는다. 베드로도 바울도 야고보도 없다.
'의의 교사'는 예수가 아니었다. 예수보다 100년 넘게 앞선 인물이고, 신이라 주장한 적도,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도, 부활했다는 기록도 없다. 제자들도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닮은 건 분위기뿐이었다. 야고보설과 바울 음모설도 대부분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문서 대부분의 연대가 야고보와 바울 시대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공정하게 말하면 기독교 쪽에도 헛다리가 있었다. 1972년 스페인의 한 신부는 7번 동굴의 손톱만 한 그리스어 조각이 마가복음이라고 주장했다. 맞다면 복음서가 아주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글자가 몇 개밖에 안 돼서 대부분 학자들은 억지라고 봤다. 사해문서는 어느 쪽의 과장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기독교의 종말은커녕, 오히려 비판자들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하는 정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반전 하나, 이사야 53장은 예수보다 먼저 있었다
회의론자들이 오래 해온 주장이 있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들, 특히 고난받는 종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찔림을 받는다는 이사야 53장은 기독교인들이 나중에 예수에 맞춰 손봤다는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구약 사본은 서기 900~1000년 무렵 것이었다. 예수보다 900년이나 뒤다. 그 사이에 뭘 고쳤는지 누가 알겠냐는 말이 나올 만했다.
그런데 쿰란 1번 동굴에서 이사야서 66장 전체가 담긴 두루마리가 나왔다. 기원전 2세기 무렵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사야 53장이 우리가 읽는 성경과 거의 똑같이 들어 있었다.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철자 차이 같은 자잘한 것 말고는 내용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예언은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기독교인이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주장은 여기서 끝났다.
덤으로, 쿰란에서는 에스더서 하나를 빼고 구약 거의 모든 책의 사본이 나왔다. 성경이 수천 년 동안 베껴 쓰이면서 크게 변질됐다는 주장 자체가 힘을 잃었다.
반전 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비판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유대교에는 없고, 그리스 로마 세계의 신의 아들 신화에서 빌려와 나중에 예수에게 덧씌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4번 동굴에서 나온 한 조각(4Q246)에는 장차 올 인물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문장이 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과 거의 같다. 그 아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고, 그 나라는 무궁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조각의 인물이 메시아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높이는 악한 왕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이 표현은 그리스에서 온 게 아니라, 예수보다 앞서 유대 땅에서 이미 쓰이던 말이었다. 그리스 신화 차용설은 설 자리를 잃었다.
반전 셋, 메시아가 오면 하는 일
또 다른 조각(4Q521)에는 메시아가 올 때 일어날 일이 적혀 있다. 하나님이 갇힌 자를 풀어주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상한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걸 읽고 학자들은 복음서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에게 묻는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자가 보고, 다리 저는 자가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흥미로운 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부분이다. 예수의 대답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정작 이사야서 해당 구절에는 죽은 자를 살린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쿰란 문서에는 그게 메시아의 표징 목록에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의 대답은 즉흥적인 말이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오면 일어날 거라고 기다리던 목록 그대로였다. 감옥에 있던 요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알아들었을 것이다. 예수는 돌려 말한 게 아니라 정확히 "내가 그 메시아다"라고 답한 것이다. 사해문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대답의 무게를 절반밖에 몰랐을 것이다.
반전 넷, 빛과 어둠
20세기 초 유명한 신학자들 상당수는 요한복음을 늦게 쓰인 그리스풍 문서로 봤다.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위와 아래를 날카롭게 나누는 요한복음의 언어가 유대 전통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이나 영지주의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2세기쯤 그리스 세계에서 만들어진 신학 작품이고, 실제 예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결론이었다.
그런데 쿰란 사람들은 스스로를 빛의 아들이라 불렀다.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이 사람 안에서 싸운다고 가르쳤다. 빛과 어둠의 대립은 예수 시대 유대 광야에서 이미 쓰이던 일상 언어였던 것이다.
요한복음의 뿌리는 그리스가 아니라 예수 시대 유대 땅이었다. 요한복음을 늦게 만들어진 신화로 치부하던 학설은 크게 흔들렸다.
반전 다섯, 예수는 쿰란과 반대로 말했다
결정적인 게 하나 더 있다. 예수가 쿰란을 베꼈다면 가르침이 같아야 한다. 그런데 문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예수는 여러 곳에서 쿰란과 정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쿰란 공동체 규칙서는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은 미워하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미워하라고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구약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령은 없어서 예수가 누구 말을 반박한 건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는데, 쿰란 문서가 나오자 그 상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쿰란의 다른 문서는 안식일에 짐승이 구덩이에 빠져도 꺼내주지 말라고 규정한다. 예수는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누가 꺼내지 않겠느냐며 사람은 양보다 귀하다고 말했다.
쿰란은 몸이 불편한 사람, 눈먼 자, 다리 저는 자를 거룩한 모임에서 빼라고 규정했다. 예수는 잔치를 열거든 가난한 자와 몸 불편한 자와 다리 저는 자와 눈먼 자를 청하라고 말했다.
예수는 쿰란의 제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시대, 같은 언어를 쓰면서 그들의 가장 핵심적인 규칙을 뒤집은 사람이었다. 분위기는 닮았지만 방향은 정반대였다.
그래서, 왜 숨겼는가
기독교를 무너뜨릴 거라던 문서는 결과적으로 복음서가 예수 시대의 유대 땅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인이 됐다. 예수의 말과 주장이 후대에 그리스 세계에서 꾸며진 신화가 아니라, 그 시대 그 땅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40년 동안 왜 공개하지 않았을까. 답은 허무할 만큼 세속적이다. 학자들의 밥그릇이었다.
처음 출판하는 사람이 명예를 가져가는 학계에서, 소수의 편집팀은 조각을 쥐고 놓지 않았다. 다들 대학 교수라 본업은 따로 있었고, 수만 개의 조각을 맞추는 일은 끝이 없었다. 완벽주의에, 게으름에, 자기 몫을 제자에게 물려주는 도제 문화까지 겹쳤다. 숨길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놓기 싫어서 숨긴 것이다.
웃긴 건 공개 이후에도 밥그릇 싸움은 계속됐다는 점이다. 한 이스라엘 학자는 자기가 조각을 맞춰 복원한 문서를 섕크스가 허락 없이 실었다며 소송을 걸었고, 이겼다. 2천 년 전 문서를 복원한 것에도 저작권이 있다는 판결이었다.
지금은 이스라엘 유물청이 구글과 함께 사해문서 전체를 고해상도로 찍어 인터넷에 올려놨다. 누구나 집에서 클릭 몇 번으로 2천 년 전 두루마리를 확대해 볼 수 있다. 40년 동안 학자 열 명이 쥐고 있던 걸, 이제는 초등학생도 본다.
다 어디 갔냐
음모론이 맞았다면 어땠을까. '기독교는 사기였다'는 다큐멘터리가 쏟아지고, 할리우드 영화가 나오고, 전 세계 언론이 '기독교의 종말'을 대서특필했을 것이다. 1991년 그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분위기는 정말 그랬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기독교에 유리한 내용만 나오자, 그 많던 '기독교의 종말' 기사와 방송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은폐설 책은 서점 구석으로 밀려났고, 음모론자들은 다음 떡밥을 찾아 떠났다. 다 어디 갔냐.
진리는 숨길수록 의심받고, 드러낼수록 단단해진다. 염소 찾던 목동의 돌멩이 하나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가 2천 년을 건너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어쩌면 그것 하나다.
예수가 태어나기 200년 전에 쓰인 문서가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안에 예수의 가르침이 이미 들어 있다면? 세례도, 떡과 포도주의 식사도, 재산을 나누는 공동체도, 억울하게 박해받은 의로운 스승도 이미 있다면?
그렇다면 예수는 새로운 것을 가르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있던 한 종파를 베낀 사람이 된다. 기독교는 거기서 끝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문서가 발견됐다. 발견된 뒤 40년 동안 세상은 그 내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동굴에서 나온 2천 년 전의 목소리
1947년, 사해 북서쪽 쿰란. 소금기 가득한 절벽과 돌밭뿐인 황량한 땅이다. 베두인 타아미레 부족의 젊은 목동 무함마드 에드디브가 잃어버린 염소를 찾고 있었다. 절벽에 뚫린 작은 구멍을 본 그는 안에 염소가 숨었나 싶어 돌을 던졌다. 그런데 들려온 건 염소 울음이 아니라 뭔가 깨지는 소리였다.
동굴 안에는 뚜껑 덮인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었다. 목동들은 금화를 기대했지만 나온 건 천에 싸인 낡은 가죽 두루마리 몇 개뿐이었다. 실망한 그들은 이걸 베들레헴 시장에 들고 갔다. 신발 수선용 가죽으로나 쓸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두루마리는 베들레헴의 구두 수선공이자 골동품상 칸도의 손을 거쳐 두 갈래로 흩어졌다. 네 개는 예루살렘 시리아 정교회 대주교 마르 사무엘이 24파운드 정도에 샀다. 나머지 세 개는 히브리대학교 고고학 교수 엘르아살 수케닉이 샀다.
수케닉이 두루마리를 확인한 날이 1947년 11월 29일이었다. 바로 그날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통과됐다. 이스라엘 건국의 길이 열린 날, 2천 년 전 유대인의 문서가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이걸 우연이 아니라 섭리라고 믿었다.
신문 광고에 나온 성경
그 사이 전쟁이 터졌다. 대주교는 두루마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팔려고 했지만 아무도 사지 않았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서로 자기 땅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판에, 샀다가 소송에 휘말릴 물건을 누가 사겠는가.
결국 1954년 6월, 월스트리트저널 광고란에 이상한 광고가 실렸다. 기원전 2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경 사본 네 개를 판다는 내용이었다. 중고차 광고 옆에 인류 최고(最古)의 성경 사본이 매물로 나온 것이다.
마침 미국에서 강연 중이던 사람이 이 광고를 봤다. 수케닉 교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군 참모총장 출신 고고학자 이갈 야딘이었다. 이스라엘이 산다고 하면 대주교가 안 팔 게 뻔했다. 야딘은 이름을 숨기고 중간 사람을 내세웠다. 뉴욕 호텔 지하 금고에서 25만 달러에 거래가 끝났다. 대주교는 거래가 끝난 뒤에야 두루마리가 이스라엘로 간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산 세 개와 아들이 산 네 개. 첫 동굴의 일곱 두루마리는 그렇게 다시 한자리에 모였고, 비교적 빨리 세상에 공개됐다. 여기까지는 해피엔딩이었다.
진짜 문제는 4번 동굴이었다
그 뒤 베두인들과 고고학자들이 주변 절벽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11개의 동굴에서 문서가 나왔다. 그중 1952년에 발견된 4번 동굴이 결정적이었다. 온전한 두루마리가 아니라 수만 개의 조각이 흙더미 속에 쌓여 있었다. 모두 합치면 900권이 넘는 책이 찢어지고 섞인 채 나온 것이다. 연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세기. 예수 시대와 정확히 겹치거나 그보다 앞선다.
당시 쿰란은 요르단 땅이었다. 요르단은 조각을 사들일 돈이 없었고, 그래서 외국 기관들이 돈을 대고 나중에 조각 일부를 받기로 했다. 그 돈을 댄 기관 중에는 바티칸 도서관도 있었다. 기억해두자. 나중에 이게 떡밥이 된다.
문지기는 가톨릭 신부였다
조각들을 맞추고 해독할 국제 편집팀이 꾸려졌다. 팀장은 롤랑 드 보. 예루살렘 프랑스 성서고고학연구소를 이끌던 도미니코회 가톨릭 신부였다. 쿰란 유적 발굴도 그가 지휘했다.
팀원은 열 명이 채 안 됐고, 대부분 가톨릭 사제이거나 기독교 학자였다. 반면 유대인 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요르단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교 문서를, 유대인은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팀은 조각을 나눠 가진 채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다. 규칙은 단순했다. 맡은 사람이 출판하기 전에는 아무도 못 본다. 외부 학자가 사진 한 장 보여달라고 해도 거절했다. 팀원이 죽거나 은퇴하면 그 몫은 자기 제자에게 넘어갔다. 드 보가 죽은 뒤에도 팀장 자리는 또 다른 도미니코회 신부에게 넘어갔다.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이제 유대인이 문서를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이스라엘은 기존 팀을 그대로 뒀다. 1980년대 말이 되도록 4번 동굴 자료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기독교 성직자들이 기독교의 기원을 흔들 수 있는 문서를 수십 년째 독점하고 있는 상황.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예수는 쿰란에서 나왔다"
의심은 문서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시작됐다. 1950년, 프랑스 학자 뒤퐁 소메르는 쿰란 문서 속 '의의 교사'가 여러 면에서 예수를 미리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1955년에는 미국 평론가 에드먼드 윌슨이 잡지 뉴요커에 긴 글을 실어, 학자들이 기독교의 독창성이 흔들릴까 봐 이 문제를 피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 글은 책으로도 나와 대중에게 크게 퍼졌다.
사실 이런 생각은 더 오래됐다. 19세기 프랑스 학자 르낭은 사해문서가 발견되기도 전에 기독교를 두고 크게 성공한 에세네파라고 평한 적이 있다. 에세네파는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론, 로마의 플리니우스가 기록한 유대교의 한 종파다. 플리니우스는 그들이 사해 서쪽에 산다고 적었다. 쿰란 공동체가 바로 그 에세네파로 여겨진다. 르낭의 말을 증명할 물증이 동굴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내부에서 터진 폭로
편집팀 안에 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의 존 알레그로. 팀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앙이 없던 그는 동료들이 기독교에 불리한 내용을 감추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가 주목한 건 문서 속 인물 '의의 교사'였다. 쿰란 공동체를 이끈 이 지도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악한 제사장'에게 박해를 받았다. 의로운 스승, 예루살렘 권력자의 박해, 그리고 그를 따르며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공동체의 생활도 초대교회와 닮았다. 물로 몸을 씻는 정결 의식을 매일 행했다. 유적에서는 계단 달린 물웅덩이가 여러 개 나왔다. 제사장이 떡과 새 포도주를 축복하는 공동 식사를 했다. 들어오는 사람은 재산을 공동체에 내놓았다. 스스로를 '빛의 아들들'이라 부르며 '어둠의 아들들'과의 마지막 전쟁을 기다렸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이사야서 구절을 자기들 사명으로 삼았는데, 이건 복음서가 세례 요한을 소개할 때 쓰는 바로 그 구절이다.
세례, 성찬, 공동 소유, 빛과 어둠, 광야의 외침. 아니 그렇다면 예수라는 인물은 쿰란 공동체 '의의 교사'의 오마주?
알레그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3번 동굴에서 나온 '구리 두루마리'를 해독했는데, 이건 성경도 규칙서도 아닌 보물 목록이었다. 금은 수십 톤이 어디어디 묻혀 있다는 60여 곳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알레그로는 직접 탐사대를 꾸려 보물을 찾으러 나섰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70년, 기독교는 원래 환각버섯을 숭배하던 컬트였다는 책을 내면서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됐다. 하지만 대중의 기억 속에는 '진실을 말하려다 쫓겨난 내부 고발자'로 남았다.
바티칸 은폐설, 그리고 스캔들
1980년대가 되자 의심은 분노로 바뀌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로버트 아이젠먼 교수는 '의의 교사'가 사실 예수의 동생 야고보이고, 문서 속 '거짓말쟁이'는 사도 바울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놨다. 예수의 원래 가르침은 쿰란 같은 엄격한 유대 종파였는데 바울이 이걸 이방인 입맛에 맞게 바꿔 기독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걸 확인할 원문은 볼 수가 없었다.
1991년에는 영국 작가 베이전트와 리가 바티칸이 사해문서를 은폐하고 있다는 책을 내 베스트셀러가 됐다. 교회가 편집팀을 통제해 예수의 독창성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나오지 않게 막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가톨릭 신부 팀장, 돈을 댄 바티칸 도서관, 쫓겨난 무신론자 내부자. 퍼즐은 너무 잘 맞았다.
여기에 결정타가 터졌다. 1990년, 당시 편집팀장이던 하버드대 교수 존 스트러그넬이 이스라엘 신문 인터뷰에서 유대교를 끔찍한 종교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는 곧바로 쫓겨났고, 처음으로 이스라엘 학자 엠마누엘 토브가 팀장이 됐다. 유대교를 경멸하는 기독교 학자가 40년 가까이 유대교 문서의 문지기였던 셈이다.
여기에 이사야 53장은 기독교인이 나중에 고쳤다, 신약의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말이다, 요한복음은 그리스 철학이 들어간 후대 작품이다 같은 오래된 비판들까지 다시 소환되며 아주 난리가 났다. 사해문서만 열리면 이 모든 게 증명될 것 같았다.
그리고 1991년, 둑이 터졌다
미국 성서고고학 잡지 편집장 허셸 섕크스는 몇 년째 "사해문서를 해방하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1991년 가을, 상황은 한순간에 뒤집혔다.
9월 초, 신시내티 히브리유니언칼리지의 노교수 워커홀더와 대학원생 아벡이 폭탄을 터뜨렸다. 편집팀이 내부용으로 만든 단어 색인집을 입수해, 컴퓨터로 역추적해서 원문을 복원해 출판해버린 것이다. 거의 시력을 잃은 노교수와 컴퓨터를 다루는 젊은 학생이 40년 독점을 깬 것이다. 편집팀은 해적질이라고 분노했다.
몇 주 뒤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도서관이 두 번째 폭탄을 터뜨렸다. 사고에 대비해 보관용으로 맡아두었던 전체 사진 필름이 자기들에게 있고, 이걸 누구나 볼 수 있게 풀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해 11월에는 섕크스 쪽에서 사진 전체를 책으로 찍어냈다.
40년 동안 잠겨 있던 문이 한꺼번에 열렸다. 전 세계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드디어 신약이 고대의 것들을 카피했다는 증거들... 기독교를 끝낼 중대한 내용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실망한 음모론자들
먼저 예수가 없었다. 예수라는 이름도, 그를 암시하는 인물도 나오지 않는다. 베드로도 바울도 야고보도 없다.
'의의 교사'는 예수가 아니었다. 예수보다 100년 넘게 앞선 인물이고, 신이라 주장한 적도,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도, 부활했다는 기록도 없다. 제자들도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닮은 건 분위기뿐이었다. 야고보설과 바울 음모설도 대부분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문서 대부분의 연대가 야고보와 바울 시대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공정하게 말하면 기독교 쪽에도 헛다리가 있었다. 1972년 스페인의 한 신부는 7번 동굴의 손톱만 한 그리스어 조각이 마가복음이라고 주장했다. 맞다면 복음서가 아주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글자가 몇 개밖에 안 돼서 대부분 학자들은 억지라고 봤다. 사해문서는 어느 쪽의 과장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기독교의 종말은커녕, 오히려 비판자들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하는 정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반전 하나, 이사야 53장은 예수보다 먼저 있었다
회의론자들이 오래 해온 주장이 있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들, 특히 고난받는 종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찔림을 받는다는 이사야 53장은 기독교인들이 나중에 예수에 맞춰 손봤다는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구약 사본은 서기 900~1000년 무렵 것이었다. 예수보다 900년이나 뒤다. 그 사이에 뭘 고쳤는지 누가 알겠냐는 말이 나올 만했다.
그런데 쿰란 1번 동굴에서 이사야서 66장 전체가 담긴 두루마리가 나왔다. 기원전 2세기 무렵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사야 53장이 우리가 읽는 성경과 거의 똑같이 들어 있었다.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철자 차이 같은 자잘한 것 말고는 내용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예언은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기독교인이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주장은 여기서 끝났다.
덤으로, 쿰란에서는 에스더서 하나를 빼고 구약 거의 모든 책의 사본이 나왔다. 성경이 수천 년 동안 베껴 쓰이면서 크게 변질됐다는 주장 자체가 힘을 잃었다.
반전 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비판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유대교에는 없고, 그리스 로마 세계의 신의 아들 신화에서 빌려와 나중에 예수에게 덧씌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4번 동굴에서 나온 한 조각(4Q246)에는 장차 올 인물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문장이 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과 거의 같다. 그 아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고, 그 나라는 무궁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조각의 인물이 메시아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높이는 악한 왕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이 표현은 그리스에서 온 게 아니라, 예수보다 앞서 유대 땅에서 이미 쓰이던 말이었다. 그리스 신화 차용설은 설 자리를 잃었다.
반전 셋, 메시아가 오면 하는 일
또 다른 조각(4Q521)에는 메시아가 올 때 일어날 일이 적혀 있다. 하나님이 갇힌 자를 풀어주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상한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걸 읽고 학자들은 복음서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에게 묻는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자가 보고, 다리 저는 자가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흥미로운 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부분이다. 예수의 대답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정작 이사야서 해당 구절에는 죽은 자를 살린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쿰란 문서에는 그게 메시아의 표징 목록에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의 대답은 즉흥적인 말이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오면 일어날 거라고 기다리던 목록 그대로였다. 감옥에 있던 요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알아들었을 것이다. 예수는 돌려 말한 게 아니라 정확히 "내가 그 메시아다"라고 답한 것이다. 사해문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대답의 무게를 절반밖에 몰랐을 것이다.
반전 넷, 빛과 어둠
20세기 초 유명한 신학자들 상당수는 요한복음을 늦게 쓰인 그리스풍 문서로 봤다.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위와 아래를 날카롭게 나누는 요한복음의 언어가 유대 전통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이나 영지주의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2세기쯤 그리스 세계에서 만들어진 신학 작품이고, 실제 예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결론이었다.
그런데 쿰란 사람들은 스스로를 빛의 아들이라 불렀다.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이 사람 안에서 싸운다고 가르쳤다. 빛과 어둠의 대립은 예수 시대 유대 광야에서 이미 쓰이던 일상 언어였던 것이다.
요한복음의 뿌리는 그리스가 아니라 예수 시대 유대 땅이었다. 요한복음을 늦게 만들어진 신화로 치부하던 학설은 크게 흔들렸다.
반전 다섯, 예수는 쿰란과 반대로 말했다
결정적인 게 하나 더 있다. 예수가 쿰란을 베꼈다면 가르침이 같아야 한다. 그런데 문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예수는 여러 곳에서 쿰란과 정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쿰란 공동체 규칙서는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은 미워하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미워하라고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구약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령은 없어서 예수가 누구 말을 반박한 건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는데, 쿰란 문서가 나오자 그 상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쿰란의 다른 문서는 안식일에 짐승이 구덩이에 빠져도 꺼내주지 말라고 규정한다. 예수는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누가 꺼내지 않겠느냐며 사람은 양보다 귀하다고 말했다.
쿰란은 몸이 불편한 사람, 눈먼 자, 다리 저는 자를 거룩한 모임에서 빼라고 규정했다. 예수는 잔치를 열거든 가난한 자와 몸 불편한 자와 다리 저는 자와 눈먼 자를 청하라고 말했다.
예수는 쿰란의 제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시대, 같은 언어를 쓰면서 그들의 가장 핵심적인 규칙을 뒤집은 사람이었다. 분위기는 닮았지만 방향은 정반대였다.
그래서, 왜 숨겼는가
기독교를 무너뜨릴 거라던 문서는 결과적으로 복음서가 예수 시대의 유대 땅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인이 됐다. 예수의 말과 주장이 후대에 그리스 세계에서 꾸며진 신화가 아니라, 그 시대 그 땅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40년 동안 왜 공개하지 않았을까. 답은 허무할 만큼 세속적이다. 학자들의 밥그릇이었다.
처음 출판하는 사람이 명예를 가져가는 학계에서, 소수의 편집팀은 조각을 쥐고 놓지 않았다. 다들 대학 교수라 본업은 따로 있었고, 수만 개의 조각을 맞추는 일은 끝이 없었다. 완벽주의에, 게으름에, 자기 몫을 제자에게 물려주는 도제 문화까지 겹쳤다. 숨길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놓기 싫어서 숨긴 것이다.
웃긴 건 공개 이후에도 밥그릇 싸움은 계속됐다는 점이다. 한 이스라엘 학자는 자기가 조각을 맞춰 복원한 문서를 섕크스가 허락 없이 실었다며 소송을 걸었고, 이겼다. 2천 년 전 문서를 복원한 것에도 저작권이 있다는 판결이었다.
지금은 이스라엘 유물청이 구글과 함께 사해문서 전체를 고해상도로 찍어 인터넷에 올려놨다. 누구나 집에서 클릭 몇 번으로 2천 년 전 두루마리를 확대해 볼 수 있다. 40년 동안 학자 열 명이 쥐고 있던 걸, 이제는 초등학생도 본다.
다 어디 갔냐
음모론이 맞았다면 어땠을까. '기독교는 사기였다'는 다큐멘터리가 쏟아지고, 할리우드 영화가 나오고, 전 세계 언론이 '기독교의 종말'을 대서특필했을 것이다. 1991년 그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분위기는 정말 그랬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기독교에 유리한 내용만 나오자, 그 많던 '기독교의 종말' 기사와 방송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은폐설 책은 서점 구석으로 밀려났고, 음모론자들은 다음 떡밥을 찾아 떠났다. 다 어디 갔냐.
진리는 숨길수록 의심받고, 드러낼수록 단단해진다. 염소 찾던 목동의 돌멩이 하나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가 2천 년을 건너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어쩌면 그것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