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하면 전통, 시민이 하면 성범죄

·
왕이 하면 전통, 시민이 하면 성범죄 — 사회, 권력정치, 사기범죄, 경제돈 ‹ ›
왕이 하면 전통, 시민이 하면 성범죄 · 이미지: 하예라 미스테리 (자유 이용)
옛날 그리스에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정의? 그거 그냥 힘센 놈한테 유리한 거야."

우리는 보통 "합법과 불법"을 따진다. 그런데 만일 불법이나 힘으로 합법으로 변경된 과연 어떨까?

왕이 하면 전통, 우리가 하면 고소.


1505년, 연산군은 전국에 관리를 보내서 예쁜 여자들과 좋은 말을 모아 오라고 시켰다. 이 관리를 '채홍사'라고 불렀다. 끌려온 여자들은 '운평', 그중에서 다시 뽑힌 여자들은 '흥청'이라고 불렸다. 이 여자들은 매일 시험을 봤고, 못하면 매를 맞았다.

칭기즈칸도 타타르라는 부족을 정복한 뒤, 그 부족 여자들은 몽골 남자들한테 나눠졌다. 칭기즈칸은 자기가 죽인 타타르 족장의 두 딸을 아내로 삼았다. 그중 언니는 남편이랑 도망치다 붙잡혔고, 남편은 혼자 달아났다.

만일 일반인들이 이렇게 했다면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나올 일인데 왕이 하면 합법적 제도가 된다.

요즘 일도 있다. 아프리카 감비아의 전 대통령 야흐야 자메는 젊은 여자들을 대통령궁 직원으로 뽑아서 월급까지 주면서 성관계를 강요했다고 한다. 미인대회, 유학 장학금 같은 나라 제도까지 이용해서 여자들을 골랐다.

리비아의 카다피도 있다. 소라야라는 여자는 15살 때 학교에 온 카다피한테 꽃다발을 줬다가, 그 뒤로 끌려가서 5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마오쩌둥 얘기는 주로 그의 주치의가 쓴 책에서 나온 것이고 김정일의 '기쁨조' 얘기도 대부분 탈북자들 말이라 의혹 이라고 해두자.

법은 이긴 자가 만든다.


위 이야기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냥 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아예 그걸 '제도'로 만들어 버렸다는 거다. 채홍사라는 벼슬, 전리품 나누기라는 관습, 대통령궁 직원이라는 자리. 권력자는 나쁜 짓을 했을 뿐 아니라, 그걸 나쁜 짓이라고 부를 수 없게 만들었다.

현대 정치도 이긴 세력들이 법을 만든다. 노동자의 정치인이 이기면 노동자가 법을 만들고, 여자들이 미는 정치인이 이기면 여자들이 법을 만든다.

생각해 보자. 법을 만드는 사람도 그 사람이고, 재판하는 사람도 그 사람 편이면, 누가 그를 범죄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란"이라는 말처럼, 같은 일도 누가 이겼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돈으로도 가능하다. 돈 많은 사람은 비싼 변호사를 쓰고, 재판이 몇 년씩 가도 버틸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은 그게 안 된다. 배고파서 물건 훔친 사람은 바로 잡혀가는데, 높은 사람들 비리는 복잡한 법 얘기에 묻혀서 흐지부지되기도 한다. 솔직히 법 앞에서는 권력에 따라 적용이 불평등하다.

그래도 속지 않는 눈이 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어느 날 옥상에서 목욕하는 여자를 봤다. 밧세바, 자기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였다. 왕은 그 여자를 궁으로 불렀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다윗은 우리아를 가장 위험한 전쟁터 맨 앞에 세우라고 명령했다. 우리아는 죽었고,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았다.

법으로는 깨끗했다. 아무도 왕을 고발하지 않았다. 고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왕을 찾아와 이야기를 하나 들려줬다.

"부자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고, 가난한 사람은 어린 암양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 집에 손님이 오자, 부자는 자기 양은 아까워서 그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잡았습니다."

다윗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
나단이 말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왕은 법을 피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까지 피할 수는 없다.
📚 출처 보기
성경

사무엘하 11~12장: 다윗과 밧세바, 나단의 비유 원문이다.
요한복음 8장 1~11절: 간음한 여자 이야기. 힘 있는 쪽은 빠지고 약한 쪽만 처벌받는 이중잣대를 보여준다.
누가복음 1장 46~55절, 4장 18~19절: 권세 있는 자를 낮추고 낮은 자를 높인다는 구절이다.
열왕기상 21장: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선지자 엘리야에게 책망받는 이야기. 나단 이야기와 구조가 같다.

역사 기록

『연산군일기』 1505년(연산군 11년) 6월 기사: 채홍준사 파견 기록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몽골비사』: 타타르 정복과 여성 분배, 예수겐·예수이 이야기가 나온다.
리즈수이, 『모택동의 사생활』: 마오쩌둥 주치의의 회고록이다. 신빙성 논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현대 사례

휴먼라이츠워치·TRIAL 인터내셔널, 감비아 자메 성폭력 조사 보고서(2019): 국가 제도가 성착취에 동원된 구조가 자세히 나온다.
아닉 코장, 『카다피의 하렘(Gaddafi’s Harem)』: 소라야의 증언과 후속 취재를 담았다.
12·12 및 5·18 재판 관련 기사(1995~1997):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 논리와 이후 판결, 사면 과정을 볼 수 있다.
1988년 지강헌 사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온 사건이다. 돈과 법의 관계를 다룬 부분에 쓰기 좋다.

철학

플라톤, 『국가』 1권: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논쟁이다. 글 첫머리 인용의 원전이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에 대한 여러 관점을 쉽게 풀어 쓴 입문서다.
니체, 『도덕의 계보』: 도덕이 힘의 관계에서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어렵지만 글의 문제의식과 가장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