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은 본래 창작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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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은 본래 창작된 남자였다 — 불교, 종교, 권력정치 ‹ ›
관세음보살은 본래 창작된 남자였다 · 이미지: 하예라노트 (자유 이용)
절에 가면 다들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아미타불을 부른다. 자식 합격, 남편 승진, 가족 건강을 빈다. 불교의 기도 응답 구조는 간단하다. 내가 빌면 관세음보살 같은 존재가 그 소리를 듣고, 자비와 원력으로 응답한다. 이게 이른바 가피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구조의 핵심 부품인 '듣는 존재'가 불교 역사의 처음 수백 년 동안 없었다. 듣는 존재가 없었으니 "비나이다, 주세요"도 없었다.

첫째, 뿅 하고 나타난 관세음보살


부처님 말씀에 가장 가깝다는 빠알리 니까야와 한역 아함경을 다 뒤져봐도 관세음보살은 안 나온다. 아미타불도, 극락정토도 안 나온다.

부처님 열반은 대략 기원전 5~4세기다. 아미타불이 처음 등장하는 한역 경전은 179년 번역된 《반주삼매경》이고, 인도 땅에서 아미타불 이름이 처음 새겨진 유물도 2세기 쿠샨 시대 마투라 불상 대좌다. 부처님 돌아가시고 600년쯤 지나서 나타난 셈이다.

가장 재밌는 건 성별이다. 인도와 초기 중국의 관세음보살은 수염 난 남자였다. 그러다 송나라 무렵 여성으로 바뀐다. 1100년경 중국에서 묘선 공주 이야기가 퍼지는데, 관음이 원래 중국 공주였다는 내용이다. 인도 경전엔 흔적도 없는, 중국에서 새로 만든 이야기다. 실존하는 존재라면 성별과 출신이 지역마다 바뀔 리가 없다.

1745년 일본 학자 도미나가 나카모토는 《출정후어》에서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앞사람 것 위에 계속 덧붙여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대승비불설이다. 지금 불교학계도 대승경전이 부처님 사후 수백 년에 걸쳐 쓰였다는 걸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인다.

둘째, 관세음이 만들어진 존재라면 기도는 어디로 가나


기도 응답 메커니즘을 기계라고 치자. 입력은 내 기도, 출력은 소원 성취, 그리고 가운데서 기도를 받아 처리하는 장치가 관세음보살이다. 그런데 그 장치가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후대에 형성되고, 지역마다 모양까지 바뀌었다면 이 기계는 핵심 부품 없이 돌아간다는 얘기다.

그럼 기도는 어디로 가는가. 받는 쪽이 입증되지 않았으니 배달 주소가 없는 편지다.

그리고 이게 원래 불교도 아니라면, 한국 절에서 보는 "비나이다" 불교의 정체는 뭔가. 한국 절에는 대웅전 옆에 산신각, 칠성각, 삼성각이 있다. 산신은 한국 토착 산신령이고, 칠성은 북두칠성 신앙이다. 둘 다 불교 경전과는 상관없다. 민간신앙의 소원 비는 구조가 불교 안으로 들어와 같이 사는 것이다. 한국 불교계 안에서도 이걸 '기복불교'라고 부르며 스스로 비판한다. 우리가 아는 "빌면 들어준다" 불교는 부처님의 불교라기보다 후대 대승 신앙과 토착 기복신앙이 섞인 결과물에 가깝다.

셋째, 부처님은 기도를 부정했다


정작 부처님은 기도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원하는 것 경》에서 부처님은 장수, 아름다움, 행복, 명예, 천상 이 다섯 가지는 누구나 원하지만 기도나 바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기도로 얻어진다면 못 얻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얻으려면 그에 맞는 행위를 하라고 한다.

상윳따 니까야의 《아시반다까뿟따 경》은 더 직설적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천상에 간다는 바라문들에게 부처님은 묻는다. 큰 돌을 호수에 던지고 사람들이 모여 "떠올라라" 하고 빌면 돌이 뜨냐고. 돌은 무게대로 가라앉고, 사람은 자기 업대로 간다.

초기불교의 메커니즘은 '응답'이 아니라 '업'이었다. 내가 한 행위가 원인이고 결과도 나에게서 나온다. 중간에서 들어주고 결정해주는 존재는 없다.

미스테리한 기도 메커니즘


여기서 이상한 장면이 생긴다. 기도를 부정한 부처님의 불상 앞에서 사람들이 소원을 빈다.

게다가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 꺼진 불처럼 더 이상 윤회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다. 기원전후에 성립한 《밀린다왕문경》에서 밀린다왕이 바로 이걸 묻는다. 이미 열반에 든 부처님이 공양을 받지 않는데 공양이 무슨 결과가 있냐고. 나가세나 스님의 대답은 이렇다. 부처님은 받지 않는다. 다만 공양하는 사람 자신의 행위가 결과를 만든다. 큰 불이 꺼져도 사람들은 자기 땔감으로 불을 피운다는 비유를 든다.

불교 내부의 대답으로도 불상은 응답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응답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응답을 기대하며 빈다. 그러다 소원이 이뤄지면 가피라고 하고, 안 이뤄지면 정성이 부족했다고 한다.

이건 대체 뭘까. 부처님의 가르침도 아니고, 실존이 확인된 존재의 응답도 아니다. 결과를 본 뒤에 그 원인을 입증되지 않은 존재에게 돌리는 믿음, 그게 지금 우리가 보는 소원성취 기도의 정체다.